- 봇들공원엔 전설이 있어.
- 뭔데?
- 하지만 난 전설 같은 건 믿지 않아.
루엔(Arwen)은 오른손으로 새뫄(Samwise)의 뺨을 어루만지듯이 밀어냈다. 때린 건 아니지만 3초 간 빈정이 상할 정도의 기분 나쁜 접촉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새뫄는 돌아간 고개를 바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빨리 말해. 고개를 돌려 루엔을 바라봤다.
- 봇들공원에 도사가 있대.
루엔이 '스읍' 소리를 내며 왼손을 들었다. 새뫄는 오른손을 들어 루엔의 손목을 붙잡았다.
- 때리긴 일러. 이건 진짜야. 해질무렵 봇들공원 산책로를 돌다보면 만날 수 있대. 아주 용한 할매래.
루엔은 들어나보자는 표정으로 새뫄를 째려봤다.
- 용하면 뭐? 어떻게 용한데?
- 딱 보자마자 막 신상 줄줄 읊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거.
- 다 알면 왜 봇들공원에서 왜 그러고 있어? 판교에 회사 다니는 사람도 여기 안 오는구만.
- 그건 모르지만, 아무튼 가보자.
- 지금? 근무시간인데?
- 어차피 근무시간인데 이러고 있잖아. 할 거 많아?
- 아무리 뒷산이라고는 해도 거길 언제 갔다가 와. 이따 퇴근 빨리 하고 가자. 5시 30분에 퇴근할 수 있어?
- 할 수 있어. 이따 보자. 공원 입구에서 봐.
루엔과 새뫄는 아직까지는 비밀인 사내 커플이었다. 누군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굳이 들춰서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가끔 팀원들과 커피를 마실 때 나누는 말들이나, 회식 자리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최근까지 내린 결론은 아무도 모르거나,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은 의심을 하다가도 논리적으로 따지다가 끝내 답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둘은 회의만 했다하면 부딪혔다.
- 두식(=새뫄) 님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일정을 어떻게 맞춰요? 맨날 이랬다저랬다 하면 개발자들은 어쩌라구요? 시간을 더 주시던가요.
- 개발자들 편한 대로 하면 사용자들이 퍽도 편하게 쓰겠네요, 그죠? 버튼 대충 띡띡 넣고. 다 됐다! 와! 그리고 다른 개발자님들은 괜찮다는데 왜 수린(=루엔) 님만 맨날 일정이 부족하다고 하는 거에요? 파트장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루엔은 두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야! 개발자들 다 밤새는 거 안 보여?
새뫄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치켜들었다.
- 야? 뭐? 야? 기획자는 지금 놀아요?
- 파트장님! 파트장님도 좀 얘기해봐요. 아니 지금 저 소리 듣고 진정하라는 말이 나와요? 진정이 돼요?
- 맨날 일주일이면 개발 다 된다면서 열흘 있다가 빌드주는데, 기획서대로 되어 있는 것도 별로 없고.
- 네가 기획을 계속 바꾸니까 그런 거잖아!
- 기획을 내가 바꿨어요? 팀장님이 바꿨지? 팀장님, 아니 제가 팀장님께 뭐라고 하는 건 아니구요.
- 아악! 그만 바꾸라구요! 기획서 버전이 일점 십인데, 일점 영하고 뭐가 달라요?
- 정말 다른 게 없을까? 한번 따져 볼까요? 다르면 어떡할 건데?
팀장은 팔짱을 끼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개발파트장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기획파트장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루엔은 개발파트, 새뫄는 기획파트에 속해 있었다. 개발파트와 기획파트는 대체로 (적어도 업무적으로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회의 분위기를 얼음장으로 만드는 건 항상 이 두 사람이었다.
분위기가 조져지긴 했지만 그래도 회의는 회의였다. 매 회의가 얼음판이었다고 해도 북극의 눈 속에서도 썰매를 끄는 개가 있듯이, 일은 어쨌든 되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서비스를 런칭하고 1시간 만에 서버가 터져서 서비스가 멈췄을 때,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다음날 저녁에 회식을 하기로 했다. 런칭 시점에 서버가 터지는 건 보통 둘 중에 하나인데,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거나 예상 접속자수를 크게 초과했을 때이다. 후자의 상황이었고, 프로젝트는 당장 눈앞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회식에 가면 파트별로 앉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지만, 이번엔 팀장이 강제로 개발파트와 기획파트를 섞어 앉게 했다. 다들 어색해했지만 이번만 그렇게 하자고 팀장이 두 손을 모아 간청하기에 다들 기분 좋게 섞어 앉았다. 사람들은 프로젝트도 잘 끝났는데 앞으로는 서로 잘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서 루엔과 새뫄를 마주 앉게 했다. 그렇게 둘은 마주 앉았다. 모두가 잔에 술을 따르고, 팀장이 건배사를 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세상 탓, 즐거우면 네 탓. 탓! 탓! 타앗!"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 수 없는 근본 없는 건배사였지만 모두 신나게 따라 외쳤다.
- 탓! 탓! 탓!
- 짠. 고생하셨습니다.
루엔과 새뫄가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잔을 부딪힌 순간, 그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그동안 회의에서 서로에게 했던 폭언들은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방에 대한 외침이었음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듣지 못하는 너를 탓하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이제 너의 마음을 이해했음을.
그날 이후로 회의에서 두 사람이 여전히 건조하게 대화를 하긴 하지만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런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루엔과 새뫄는 회의시간 마다 남동생 로봇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색*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런 건 알지 못하고, 그저 두 사람이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레드벨벳 <Dumb Dumb> 중)
두 사람은 5시 30분 퇴근을 입력하고 각자 파트원들에게 퇴근사실을 알렸다. 루엔이 먼저 나가고 5분 뒤에 새뫄가 나갔다. 루엔이 봇들공원 입구에 가려고 육교를 건너는데, 공원입구쪽에서 같은 개발파트원인 성순이 쓸쓸히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 나가셨지?’ 루엔은 약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 성순 님, 어디 다녀오세요?
성순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 네, 들어가세요.” 하면서 루엔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루엔은 성순이 어떤 상태인지, 들어가라는 게 당최 무슨 말인지 같은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루엔은 공원입구에서 초조하게 새뫄를 기다렸다. 또 아는 누군가를 만나면 뭐라고 말할 지 고민했다. “운동하러 왔어요”가 가장 무난한 답변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에 새뫄가 나타났다.
- 오다가 성순 님 만났다? 사무실 들어가는 것 같았어, 쓸쓸하게.
- 나는 이 앞에서 만났는데, 다른 생각에 깊게 빠져 계시던데?
-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 야, 우리가 이상해?
-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 됐어, 가자.
두 사람은 봇들공원 안내 표지판 앞에 섰다.
4월이라 해가 많이 길어져서 약간 이른 퇴근이긴 했지만 올라갔다와도 해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표지판의 산책로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여기를 이렇게 한 바퀴 돌아서’ 팔각정에 가기로 했다.
산책로는 조용했다. 사람의 발길이 느껴지긴 했지만, 여기에 사람이 왜 오지 싶은 느낌이었다. 산책로라기 보다는 오솔길에 가까웠다. 뉴스에서 종종 나오는 ‘인근 야산'이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무밑에 쌓여있는 나무의 부산물들을 휘휘 저으면 공룡뼈 화석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원이라고 간간이 벤치 같은 것도 있고, 약간 넓은 공터도 있었다. 공원은 정말 작아서 지도에서 본 갈림길이 짧은 간격으로 등장했다. 15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두 사람은 팔각정에 도착했다. 팔각정엔 남자 한 명이 판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떨고 있었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자 황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뛰어갔다. 새뫄가 말했다.
- 저 분 우리 회사 사업지원팀 아니야?
- 그래? 난 그쪽은 잘 몰라서. 넌 사업지원팀 사람을 어떻게 알아?
- 저번에 미팅 한번 한 적 있어.
두 사람은 팔각정에 올라섰다. 회사 건물을 먼저 찾았다. 회사 건물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을 살펴봤다. 건물 옥상에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두세 사람씩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루엔이 말했다.
- 할매가 매일 있지는 않나보네.
- 아, 맞다. 우리 할매 만나러 온 거지.
- 네가 오자고 했잖아.
- 사실 할매는 핑계였고, 너랑 여기 와보고 싶었어.
- 에휴, 그래. 그런데 왜 여기야?
- 판교를 내려다 보고 싶었는데, 여기가 좋겠더라고. 스포츠센터에 있는 타워는 회사랑 떨어져 있어서 이 느낌은 아닐 것 같고. 너랑 판교에 있을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 …
- 근데 있잖아.
- 왜?
- 가서 다른 사람 만나게 되면, 나 신경쓰지 말고 그냥 만나.
- 그게 무슨 말이야?
- 1년이긴 하지만, 가서 외로울 거고,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게 지금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 그러다가 혹시 알아? 가서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냥 만나.
- 뭐야 그게. 그럼 너는?
- 나? 나랑도 헤어지면 안 되지.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 딱히 헤어지고 뭐고도 없지 않을까?
- 나보고 바람 피우라는 거야?
- 아니, 아니지. 피우라는 게 아니라, 피워도 된다는 거지. 근데 그걸 바람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는 거고.
- 그럼 너도 다른 사람 만날 거야?
- 아니, 나는 그러면 안 되지.
- 그럼 나는?
- 너는 그래도 된다고.
- 왜 그래도 되는데?
- 잘 들어봐. 이건 너와 내가 계속 만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네가 미국을 다녀온 이후에도 우리의 관계를 지속할 확률이 가장 높아지는 방법인 거지. 1년 사이에 내가 너를 보러 미국에 간다고 해도 많아야 두 번일 거야. 한 번 가도 오래 있지 못할 거고. 너는 그 사이에 한국에 오지 않을 거고.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그게 가장 최선의 상황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지. 여기까진 이해했어?
- 어, 그래서?
- 그런데 네가 외로워져. 그러니까 네가 혼자 나가서 외로워 할지 안 할지는 아직 몰라. 너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외로울 수도 있다고 해보자? 나는 시차도 안 맞는 상황에서 가끔 영상 통화나 하는 게 전부일텐데.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분명히 한계가 있고, 그게 너의 외로움을 조금은 덜 수 있겠지만,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할 수 있어. 그리고 생각해보면 외롭냐, 외롭지 않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 달라진 환경에 맞추어서 너에게 맞는 사람이 네 앞에 나타날 수도 있잖아. 그럼 우리가 흔히 가진 통념대로라면, 너는 그 사람과 나를 두고 고민을 해야 해. 나를 택하면 그 사람을 포기해야 하고, 그 사람을 택하면 나를 포기해야 하는 거지. 이 상황에서 내가 택해질 확률이 1/2이라고 해보자. 이 확률은 상황에 따라 바뀔 거야. 확률이 얼마냐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둘 중 아무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너와 내가 헤어질 확률은 0인 것이지. 양자택일의 상황을 없앴기 때문에.
- 그건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너를 믿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 그럼 그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야?
- 아니, 아니야. 한국에선 일어날 수 없어. 한국에서 감히 나를 제치고 누가 너를 만나겠어. 한국에선 내가 자신이 있지.
- 퍽도 그러시겠다.
- 뭐 그건 이미 증명된 거 아닙니까?
루엔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새뫄도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나만 나쁜 년 만드는 거 아니고?
- 나는 단지 너와 나의 관계를 먼 미래까지 유지하고 싶을 뿐이야.
- 에휴, 그래 잘났다. 내가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쳐. 그런데 너한테 얘기를 안 할 수도 있잖아.
- 그럼 안 되지. 서로 숨기는 것이 없는 게 건전한 관계가 아닐까?
- 지금 이 상황이 건전한 건 맞구요?
- 안 건전할 건 또 없지 않나요?
- 에휴 내가 말을 못한다. 내가 새 사람하고 너무너무 잘 맞아서 너랑 헤어지겠다고 하면?
- 그럼 헤어져야지. 이건 확률의 문제야. 그럴 확률도 물론 있겠지만, 1년 뒤엔 한국으로 돌아올 거잖아? 그 사람도 같이 온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거지. 그런데 그 사람이 한국에 같이 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너랑 정말정말 잘 맞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어. 아직까진 그게 나인거고. 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땐 높은 확률로 그게 나일 거고.
그때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이놈아! 니들은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헤어져.”
루엔과 새뫄는 뒤를 돌아봤다.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자색 개량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당장 헤어져. 니들은 헤어져야 다시 만나.”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새뫄가 말했다.
“두식이랑 수린이. 작년 겨울에 회식 끝나고 각자 집에 가다가 서로 연락했지? 둘이서만 따로 술 마셨지? 맞아, 아니야?”
루엔과 새뫄는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회사 건물 10층에 임원실로 쓰던 빈 방 하나 있지? 너네 가끔씩 거기서 만나는 거 내가 여기서 다 보고 있어.”
루엔과 새뫄는 회사 건물을 바라봤다. 옥상 밖에 안 보였다.
“다 보여. 니들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없을 것 같아?”
없을 것 같다고 루엔이 대답했다.
“있을 것 같아, 없을 것 같아? 오천원만 줘. 현금 없지? 여기.”
할아버지는 다가와 QR 코드가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루엔은 주섬주섬 전화기를 꺼내 QR 코드를 찍었다. ‘김안섭 님께 5,000원을 송금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전화기를 들어 확인했다.
“어, 왔네. 한 명이 알고 있어. 조만간 두식이 찾아갈 거야. 귀인이야, 잘해줘. 니들은 헤어져. 나 간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으며 돌아갔다. 루엔과 새뫄는 말없이 판교를 내려다봤다. 오른편엔 산 뒤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2. 봇들공원 간달프
3. 운중천 시라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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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밥 할머니와 포르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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