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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더 무서울까 - 모르는 것에서 오는 공포와 아는 것에서 오는 공포

백도 황도지사

by 아서킴 2024. 5. 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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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나를 해하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무서운 이야기 혹은 영화나 드라마는 나를 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공포물이라 부르는 것은 간접적으로 나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런 (예를 들면, 천장에 귀신이 매달려서 머리를 말려달라하는) 일이 세상에서 딱 한 번 일어났는데 그게 하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통제되지 않는 공포물을 만드는 것-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은 창작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런 간접적인 두려움은 모르는 것에서 온다고 해야 할까, 아는 것에서 온다고 해야 할까.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리뷰해주는 프로그램을 보면 다양한 사고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낮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준다. 그것들을 모아놓으니, 어쩐지 나에게 해가 될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많이 높아보인다. 프로그램의 취지는 안전운전을 하자,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하면 이렇게 대처하자, 일텐데, 보고 나면 사고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하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릴 때 최대한 안전한 위치를 찾아 선다거나, 운전하다가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앞에 있으면 거리를 벌리고 주의 깊게 운전을 하게 된다.(긍정적인 영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티비에서 본 그 상황을 실제로 겪어 보지는 않았다. 이건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간접적으로 아는 것과 직접적으로 겪어본 것은 분명 다르다. 겪어보지 않은 상황을 직접 겪었을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예로부터 훈련이란 것을 해왔다.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위내시경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대장내시경을 같이 했던 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수면으로 검사를 받았다. 두어 달 전 검사를 받았을 때도 시작 전에는 약간 긴장이 되었으나, 내가 얼마만큼의 시간과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은 칭찬을 받았다. 내시경 줄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위에 닿는 순간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정말 잘하시네요." 내시경 줄을 꿀떡꿀떡 삼킬 때의 느낌, 이것은 분명 아는 공포이다. 맨 처음 위내시경을 받던 순간을 기억한다. 눈물과 침을 줄줄 흘리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것은 지나가는 일임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여전히 그 느낌을 떠올리며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처음 이후로 위내시경에 대한 공포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매번 비수면으로 하는 게 아니겠나.

 

극단적인 예시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보자. 극단적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일뿐, 이 땅에서 전쟁을 겪은 세대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지금도 지구상 어딘가에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나는 겨우겨우 살아있지만 내가 알던 사람들이 폭격으로 사망하고, 우리집 주위의 건물들이 무너져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매일밤 폭격이 계속 되고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나의 공포는 줄어들 수 있을까. 아마도 매일 똑같은 수준의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공포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다큐멘터리 영화 <사마에게> 시리아 알레포에 사는 주인공은 내전을 겪는다.

 

문제는 공포의 수준에 달려 있으며, 그 수준은 겪어봐야 알 수 있다. 위내시경은 반복을 통해 무섭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맨 처음 위내시경을 하던 때이다. 그래서 공포는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했다. 실질적으로 나에게 해가 되지 않지만 겪어보지 못한 데서 오는 두려움은 그것을 맨 처음 겪는 순간(혹은 직전)에 가장 크다. 하지만 직접 겪은 무언가가 나에게 명백히 해가 됨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공포는 줄어들 수 없다. 무서운 건 현실이다. 차라리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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