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다깨다 하는 새벽, 비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화면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한 줄 쓰고 테스트, 한 줄 지우고 테스트를 반복하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다. 내일-이제는 오늘- 아침에는 빌드를 전달해야 했다. 쉽게 발견될 것 같지 않은 에러였지만, 알게 된 이상 수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적당히 넘겨봤자 QA까지 속여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1시간만 더 빨리 발견했다면, 옆자리 호아킨에게 떠넘길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호아킨은 자기 할일은 끝났다며 여행 준비를 하다가 퇴근했다. 비버도 퇴근을 하려고 했는데, 기획팀의 메이브가 테스트용 스마트폰을 들고 나타났다. 길었지만 두 글자로 요약하면 '해줘'라고 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메이브도 퇴근을 했다.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분리되어야 할 변수가 하나로 사용되고 있었다. 변수를 두 개로 나누면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비버가 짠 코드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빌드 전달을 미뤄도 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왔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오래된 회사라면 전설 혹은 괴담이 있기 마련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냐 없냐로 그 회사가 스타트업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스타트업은 전설이나 괴담이 발생하기엔 세대가 너무 짧다. 최소 한 세대 정도는 지나가야 이런 것들이 생겨난다. 가끔씩 인터넷에서 보이는 '스타트업 괴담'은 괴담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추악한 일들이다. '스타트업 전설'은 엑시트라는 단어로 통용된다. 오래된 회사임에도 전설이나 괴담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와야 하는데, 중간에 입이 많이 없어져서 그렇다.
비버의 회사에는 전설과 괴담이 하나씩 있었다. 전설은 이렇다. 사내 커플로 의심되는 개발자와 기획자가 있었다. 딴에는 숨긴다고 노력했겠지만, 반복되는 패턴은 모두가 알아채기 마련이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단체대화방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3시에서 5시 사이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개발자는 비상계단으로 기획자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부터 단체대화방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짐작만 할 뿐, 대화방의 어느 누구도 그 둘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현장을 덮치자는 제안을 했다. 그들은 계획을 짰다. 기획자는 항상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옥상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 아무도 못봤을 리가 없다. 10층 어딘가일 것이다. 누군가 보건실 뒷편 복도에 이런 凹 식으로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제보를 했다. 이런 비효율적인 공간이 왜 있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음날 두 조로 나뉘어 각각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10층 보건실 뒤의 현장을 덮치기로 했다. 3시가 되자 대화방의 모든 사람들은 논란 속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개발자가 먼저 비상계단으로 나가고, 기획자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갔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일이 있는 척하며 각자의 루트로 10층 보건실 앞에 모였다. 모두 입으로만 웃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꺼번에 갈 수는 없으니 대표로 두 사람만 보건실 뒤로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두고 올 것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빈 종이상자를 하나씩 들었다. 뒷꿈치를 들고 살살 걸으며 문제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빈 공간에 상자를 내려놓을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척을 하며 현장을 덮쳤다. 그곳에는 중년의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가 놀라 '으헉'하는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렸다. 그곳은 미화담당자들의 휴게실이었다. 따로 쉴만한 공간이 없어서 버려진 공간을 휴게실로 사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뻘줌하게 "여기가 아니네"하면서 상자를 들고 돌아나와, 사람들을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자리로 돌아오니 논란의 개발자와 기획자는 각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 빼고 어디 다녀오세요?" 개발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듬해 커플로 의심받던 개발자와 기획자는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회사를 떠났다. 문제의 공간은 벽과 문이 생기고 정식으로 미화담당자 휴게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잊혀질 즈음 개발자와 기획자가 각자 이혼 후 서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정말 회사에서 따로 만났을까? 만났다면 그곳은 어디였을까? 한동안 논쟁이 이어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2시 44분. 비버는 디버깅을 마치고 두 팔을 위로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시바아아아알.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싸려는데 앞 라인에 모니터가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모니터에는 보이그룹으로 추정되는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 재생되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춤을 추는 장면과 다같이 컴퓨터 앞에 모여 있고 한 사람이 게임을 하는 장면, 서로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하며 부둥켜 안는 장면, 눈이 시뻘건 개발자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코드를 쓰는 장면이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점심시간에 들은 괴담이 떠올랐다.
"예전에 우리 회사에 개발 밖에 모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어느 회사나 한 명씩은 있는 개발 엄청 잘하고 좋아하는데 사회성은 없어보이는 사람들 있잖아. 개발 '처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알파긱'이라고 해? 방금 지어낸 말 아니야? 아니라고? 알았어.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었대. 하루는 그 사람이 쓴 코드에서 에러가 났는데, 그걸 그 사람이 아니라 옆자리에 있던 개발자가 발견한 거야. 발견한 사람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고치겠다고 했는데, 그 개발자가 막 화를 내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자기가 확인을 해보겠다고 한거야. 사람들이 놀란 게 그 사람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그 사람이 쓴 코드에서 에러가 난 걸 처음 본 거야. 발견한 사람은 알았다고 하고, 먼저 퇴근을 했대. 그 개발자가 남아서 확인을 해보는데, 그 사람 장비에서는 아무리 봐도 문제가 없는 거야. 발견한 사람이 에러를 캡쳐해서 슬랙에 올렸는데, 에러를 재현해보니 에러가 3줄이었대. 근데 슬랙에는 에러를 2줄만 올렸어. 마지막 줄이 중요했던 거지. 그래서 발견한 사람한테 전화를 걸었대. 걸었는데, 전화를 안 받는거야. 새벽까지 전화를 60번을 넘게 했다고 하더라고. 톡도 100개는 받았다는 거 같아. 메시지 마지막 즈음엔 그냥 자기가 확인할 테니까 노트북 비밀번호를 내놓으라고 했대. 다음날 사람들이 출근을 했는데, 에러를 발견한 사람 노트북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대. 근데 키보드랑 화면이 분리된 게 아니라 노트북이 닫힌 상태에서 반으로 쪼개져 있었대. 쪼개진 부분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주먹으로 친 자국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 개발자 노트북에는 남자아이돌 영상이 틀어져 있었고, 볼륨은 최대로 켜져 있었대. 그후로 그 개발자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가끔씩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 자리에 있는 모니터에서 눈이 새빨간 사람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코딩을 하고 있는 영상을 봤다는 거야. 이상한 건 모니터 상에 코드가 보이는 각도에서 코딩하려고 앉아 있는 사람의 눈을 볼 수가 없거든. 근데 봤다는 사람마다 코드도 보고 두 눈이 새빨간 것도 봤대."
비버는 영상이 나오고 있는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보이그룹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화면에는 눈이 빨간 개발자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코딩을 하고 있었다. 모니터가 바라본 개발자의 모습과 개발자가 바라본 모니터의 화면이 동시에 보였다.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건 불가능한데?' 그 둘을 동시에 볼 수 없다고 인지한 순간, 화면 속 빨간 눈의 개발자가 씨익하고 웃었다. 에이 뭐야... 비버는 어둠이 깔려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바깥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은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사무실을 비추고 있었다. 새빨간 눈의 개발자가 거기 있었다. "내가 더 빨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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