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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에서 팀장되기

백도 황도지사

by 아서킴 2024. 4. 1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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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을 틀면 춥고 끄면 더운 애매한 날씨였다. 정확히는 에어컨 설정 온도를 18도로 해야만 제 기능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애매해진 날씨였다. 조용히 가서 에어컨 온도를 22도로 바꾸고 나면 얼마 뒤 다시 추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정 온도를 확인해 보면 어김없이 18도로 바뀌어 있었다. 한번은 22도로 설정하고 자리로 돌아와서 누가 바꾸는지 보려고 뚫어지게 에어컨 스위치 쪽을 바라봤다. 5분 정도 바라봤을까, 갑자기 비버가 옆에서 나타나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일 안 해?" 일대일로 말을 걸 때는 항상 반말이었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봤다.

 

"잠깐 나와봐."

 

비버는 원래 이름을 저스틴 비버의 비버(Bieber)로 지으려고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쓰기로 정해지면서 인사팀에서 구글 시트에 영어 이름을 적으라고 했는데, 당시 비버는 일이 너무 바빠서 옆자리 팀원에게 "죄송한데 제가 지금 회의에 가야 해서, 저는 저스틴 비버의 비버로 적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라고 했다. 비버는 며칠 뒤 Beaver(차태수)라 적힌 이름표를 받았다. 비버는 당황해서 구글 시트에 들어가 봤다. 개발팀 차태수 옆에 '저스틴 비버의 비버'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 위로는 Joaquín, Karina가 적혀 있었다. "도현, 아니 조아쿠인? 이거 맞아요? 도현 님, 제 이름은 왜 이렇게 되어 있죠?" "아 호아킨이라고 읽는군요." "제가 그렇게 적어달라고 하긴 했는데, 스펠링이 이게 아니라서요." "이런 걸 인사팀에서 알아서 할 리가 없잖아요." "인사팀에 물어볼게요." 비버는 인사팀 담당자에게 연락하기 위해 사내용 메신저를 열었다. 21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메시지에 답을 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아침에 연락하기로 하고 퇴근을 했다. 다음날 비버는 더 이상 이름을 변경할 수 없다는 답장을 받았다. 이름표도 다 나왔고 전산 입력도 완료되었다, 똑바로 적어야지 그렇게 적고 나서 이제와서 따지면 어떻게 하냐, 비버로 해달래서 비버라고 하지 않았느냐, 변경할 시간도 드렸다, 내가 지금 이것 때문에 얼마나 바쁜지 아냐, 는 말을 들었다. 호아킨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아 퇴사처리 되었다. 영어 이름으로 실랑이 벌인 인사 담당자는 인사팀장이 되었다. 비버는 개발팀장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서 저스틴 비버를 떠올리지 않았다. 가끔 그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날엔 비버만 없는 팀 대화방에 '소리지르는 비버 짤'이 올라왔다. 비버가 저스틴 비버의 비버가 된 평행세계에서도 같은 짤이 올라왔다.

 

비버는 웬일로 사내카페가 아닌 건물 밖의 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뭐 먹을래?" 그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목에 걸린 사원증 홀더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진동벨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즘 일은 어때? 잘 되어가? 많이 바쁘지?"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데,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놀려 타자를 쳤다. 제대로 안 듣고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이어서 하려고 말을 멈추자, 그는 여지없이 "아니야, 괜찮아, 계속 말해"라고 했다. 그래서 마저 얘기를 하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음료를 가져와 앉았는데도 그는 계속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미안, 갑자기 연락이 와서. 아니 뭘 이런 걸 물어봐. 그래서 뭐한다고?" 나는 했던 얘기를 세 줄로 요약해 다시 말했다. "어, 그래. 힘들겠네." 이런 시... 애써 웃었다. "아서가 이제 나 대신 팀장해." 네? "팀장하라구, 별거 없어." 이런 시...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반말을 하는 건,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고, 3년 가까이 같이 일을 하면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아닌데 말이다. 3년 전 처음 입사했을 때, 우리팀에 개발자라고는 비버 밖에 없었다. 급했구나, 나를 뽑은 걸보니. 비버는 사내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친절하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해주겠다고 했다. '친절하게'는 내가 느낀 게 아니라 그가 실제로 한 말이다. 개발팀은 5명에서 지금 이렇게 2명이 되었다며 실실 웃었다. "이 모든 건 영어 이름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회사에서 갑자기 영어 이름을 쓰라는데, 너무 낯간지러운 거예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어색하게 웃는거죠. 근데 또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했죠. 직급에서 '님'자도 빼고 부르라는 거에요. 그래서 실장한테 가서 '타이칸'하고 불렀더니, 처음엔 째려보더라니까. 그렇게 다들 어색하니까 말을 잘 안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더니 다음달에 3명이 동시에 나갔어요. 같은 회사로 갔더라구요.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그 회사도 영어 이름을 쓴대요." "어쨌거나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더." "아, 아서구나. 미안해요. 아서. th가 '드'가 아니라 '스'구나. 왜 아서로 했어요?" "닮아서? 아서가 뭔데요?" 검색 결과를 비버 앞에 들이밀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시...

 

"아니, 내가 어떻게 실장이 돼. 나가려고." "그냥 나가서 몇 달 쉬려고." "몰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무도 안 말리던데? 너는 말릴 거야?" "아니야, 말려도 소용 없어. 내가 안 나가도 팀장은 아서야." "안 한다고 못할 걸? 내가 알지, 알아." "다른 사람은 안 물어봤어. 물어볼 것도 없지." "근데 그거 알지? 팀장한다고 월급 더 안 준다."

 

비교할 만한 대상이 많지 않지만, 팀장으로서의 비버는 뭐랄까, 조금 애매했다. 분명 경력이 꽤 되는데도, 잘 몰랐다. 아니, 많이 몰랐다. 어떤 때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끔씩 모여서 코드 리뷰를 하면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들짝 깨면서, "어, 좋네. 잘했어." 하는 게 전부였다. 코드를 세로쓰기로 작성해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도 종종 뜬금없이 지적을 해왔다. "여기 버튼 클릭하면 이상한 거 열려." "데이터가 이게 맞나?" "배포 안 된 거 같은데?" 서비스에 문제가 생기면 팀원들을 찾았다. "해줘." "원인이 뭐였어?" "고생했어, 앞으로는 잘해." 그는 자리에 앉아 있을 때면 항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우다다닥 소리가 나는 그의 기계식 키보드는 반복적으로 소음을 만들었다. 한번은 키보드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슬며시 물었다. "개발자는 기계식이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늘 바빴다. 캘린더는 일정으로 가득했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자리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메시지? 어, 이제 봤네. 그냥 하지." "그냥 했어? 잘했어." 늘 그런 식이었다. 인간으로서는 평균 이하인 것이 분명하다.

 

"뭘 걱정을 해. 그냥 하면 돼. 그 말 있잖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내가 네 인생을 어떻게 책임져." "하는 거다? 실장님한테 얘기한다?" 반정도 남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버는 어깨를 쫙 펴고,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나는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와 싸늘한 공기를 마주했다. 에어컨은 18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이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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